[아무거나]/영화

행복(2007)-행복은 현재형인가, 미래형인가

뤼튼존 2008. 1. 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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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라는 영화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찾는 것인지, 혹은 행복 자체를 노래한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행복을 찾는 과정을 그린 것에 조금 더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행복을 찾았다고 볼 수 없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 상태 그대로의 ‘현상’, 혹은 ‘상태’일수도 있고, 혹은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불나방처럼 좇는 ‘목적’일수 있다. 이 영화는 도대체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행복의 몇 가지 속성, 현재성과 미래성의 어긋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없었던 영수(황정민 분)는 그냥 그 ‘상태’를 즐기는 양아치다. 간경변으로 고생하다가 시골에 있는 요양원에서 새 삶을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유혹이 많다. 그러다 만난 은희(임수정 분)는 자신도 아픈 몸으로 헌신적으로 영수의 병간호를 하고 결국 영수의 병이 나아서 요양원 밖에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영수로 대표되는 이른바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라는 고전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한 영화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금만 더 뜯어보면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다양한 행복에 대한 생각이 충돌하는 것으로 행복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 오히려 물어본다.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냐고.

 몸이 아파서 몸만 낫는다면 다시 화려한 도시-사실은 돈을 좇으며 술과 섹스로 가득 찬,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별로 행복하지도 않을-로 돌아오겠노라고 영수는 다짐한다. 요양원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몸도 나아가는 영수는 몸은 아프지만 헌신적이고 예쁜 은희를 만나 시골 생활에 정착한다. 요양원으로 찾아오는 영수의 친구와 영수의 전 여자친구. 영수는 잠깐 도시에 다녀온다고 이야기한다. 여전한 환락. 그리고 돈. 예정보다 늦어서야 도착한 영수는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에게 행복은 돈과,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로서의 환락, 신기루 같은 것이다.

 도시에서는 노후 자금이 4억 7천 만 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영수, 그냥 이렇게 살면 되었지 더 이상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은희. 밥을 천천히 먹는 게 지겹다는 영수.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은희.

 4억 7천 만 원의 노후자금이라던가, 혹은 아픈 은희가 밥을 천천히 먹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영수에게 속한 행복론이다. 빠른 차를 타고 다니며 돈을 더 벌고자 노력하며 노후를 염려하는 듯한 영수는 미래에 대한 행복을 좇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에 대한 행복은 기대만 있을 뿐 그 형상이 없으므로 때로는 불안해진다. 그 진행이 보이지 않으므로 즉자적인 진행의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영수는 그럴 때마다 현재에 집중한다. 술과, 여자, 빠른 스포츠카.

 그저 사랑하는 영수와 이 상황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이 좋은 은희. 그녀의 행복론은 상당히 현재적인 것만 같다. 매일매일 영수의 녹즙과 밥을 만들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가끔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 것이 전부인 따분한 시골 생활을 묵묵히 행복이라고 받아들이는 은희는 그래서 영수의 이별 통보가 어이없기만 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행복이 깃들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은희는, 그래서 삶을 연장하는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이라고 믿고 있다.

 이 두 사람의 행복해 보이는 외연이 깨지는 것은 영수의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에 대한 생각이 교차하기 마련이고, 이 두 가지가 성립되었을 때만 사람은 궁극적으로 행복해진다. 몸이 아픈 것은 결핍의 증거이다. 또한 두 사람의 상처이다. 몸이 완벽해지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은희는 죽고-너무나 신파적이게도-, 영수는 간경변이 도저 요양원에 다시 찾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영수는 미래를 꿈꾸면서 술과 여자에 찌든 현재에만 머물러 있었고, 은희는 현재만을 생각하면서도 그 상태로 지속되는 미래를 꿈꾸었다. 은희가 죽는 순간, 은희는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지만, 영수는 다시 미래를 찾기 위해 요양원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현재가 다가오면 미래는 한 발짝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영화처럼 저런 여자와 시골에 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버텨낼 수 없는 까닭은 행복이 ‘관계’ 외적인 것에 있다고 믿는 어떤 신앙과도 같은 오해 때문일까.

 이 영화를 본다면 ‘나는 어떤 행복을 원하는가’ 하고, 곰곰이, 곰곰이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