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라는 새로운 히로인의 탄생. 양조위의 여전한 연기력. 2시간 4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이안 감독의 혀를 내두르는 스토리텔링과 영상미. 이것은 영화 <색계>가 개봉 당시에 받았던 찬사들이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색계>의 가장 큰 재미는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주인공간의 밀고 당기기가 주는 긴장감이며, 또한 이 긴장감은 죽음과 섹스의 이면적이고도 동일한 모습의 변주로 이루어진다.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왕차이즈(탕웨이)와 이대장(양조위)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곳은 공간이다.(이하 왕차이즈-왕, 이대장-이) '이'의 공간을 서서히 잠식하여 결국 그를 죽이려는 '왕'과 그 일당. 그리고 자신의 공간을 뺏기지 않으려 경호원까지 의심하며 살아가는 '이'는 만나는 와중 직접적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상대의 공간을 뺏고,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서 공간은 물리적인 것에서 점점 심리적인 것으로 전이된다.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막부인'으로 위장한 '왕'은 '이'의 부인 곁에서 마작을 하며 잠깐잠깐 들르는 이와 인사하며 물리적인 거리를 줄인다. 그러나 그 공간에는 다른 이들이 같이 혼재되어 '왕'의 살해 의도를 실현할만한 여지가 아직 없다. '이'와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공간,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왕은 비로소 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죽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그만큼 상대를 믿는 거리인 것. 그런 거리를 확보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왕'은 '이'와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좋은 양복점을 안다는 핑계로 이와 사적인 시간을 확보하려는 왕은 성적(性的)인 매력을 통해서라도 이를 제거하려고 하고 이는 그러한 공간을 주지 않은 채 계속 왕의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는 이가 상하이로 떠나버려 공간의 긴장이 풀려버린 순간, 왕은 깊은 허무감에 사로잡힌다.
다시 만난 <이>, 죽음의 공간과 사랑의 공간의 일치
왕은 몇 년 뒤 상하이에서 동료들과 다시 만나 이의 행방을 알고 다시 계획에 일조하게 된다. 다시 나타난 <막부인>은 남편 사업의 악화로 밀수입을 하는 상황으로 설정. 다시 이의 부인에게 나타나 여러 선물로 호감을 얻고 몇 년 전 가졌던 그 공간을 다시 확보하기에 이른다. 다시 나타난 왕을 보고 심하게 동요하는 이.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막부인>을 멀리했었지만, 서서히 흔들린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거리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거리는 물리적으로 같다. 가장 가까운 근처로 가지 않으면, 둘 만의 은밀한 공간이 없으면, 죽이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둘 다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거리감은 죽일 수 있는 가능성과 사랑의 미약함을 나타낸다. 눈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죽일 공간이 필요했던 왕과 사랑을 나눌 공간이 필요했던 이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맴돌다가, 결국 의심 많은 이가 은거지로 사용하던 오래 동안 청소도 하지 않는 어느 맨션에서 맞닥뜨린다. 드디어 둘만의 시간, 둘만의 공간. 서로의 맨살이 닿을 수 있는, 혹은 칼을 배에 꽂아넣을 수 있는 거리에서.
새디즘, 섹스와 죽음의 갈래길
이 영화에서 극찬 받는 것은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텔링이지만, 가장 화제가 되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이와 왕의 격렬한 베드신이다. 노출 수위도 수위였지만, 거친 모습으로 여자를 다루는 '이'의 새디즘적이고 광적인 모습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죽음과, 사랑의 상징으로서의 섹스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또한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접촉과 삽입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직접’ 누구를 죽이는 것과 누구와의 섹스는 접촉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자면, 칼부림 같은 것이다.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사람을 죽이는 총이라던가, 혹은 약이라던가 있지만, 죽이는 순간에 자신이 죽이고 있다는 느낌을 직접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직접적인 접촉, 타격 혹은 흉기의 삽입에 있다. 왕은 죽이기 위해 이를 접촉하고 이는 사랑하기 위해 왕을 같은 공간에서 만난다. 죽음과 섹스가 뒤섞여버린 공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를 죽일 수 있는 공간에서 왕은 이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가 왕의 정신을 잠식하여 들어간다. 왕은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고백한다.자신이 이에게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아느냐고 항변하면서.(아마도 이런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워해야 절정에 올라요. 그는 뱀처럼 파고 들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점점 이에게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은연 중에 고백한다. 자신이 이를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점점 사라져간다. 왜 이런 공작에 참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늘어간다.
새디즘은 섹스에 있어서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가학적인 변태증이다. <색계>에서의 새디즘은 충격적인 장면의 나열로 화제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아니라, 나름 죽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그 안타까움과 운명의 잔인함 같은 것을 드려내려는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감시와 의심 속에서 공간을 좁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그들. 왕은 이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의 확고한 애국에의 정신을 침해당한다. 어쩌면 그 정신은 격렬하고 폭력적인 정사 앞에 죽임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지닌 채 정치범들을 죽이고, 왕의 신념을 죽인다.
죽는 공포를 영화 내내 떠안은 사람은 이, 죽여야 되는 강박을 달고 사는 사람은 왕. 새디즘적인 섹스로 상대를 의심하며 그의 정신을 잠식해가는 사람은 이, 그 폭력적인 섹스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오히려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왕. 사랑하여야 할 시대인지, 죽여야 할 시대인지, 사랑하여야 할 상대인지, 죽여야 할 상대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슬픈 모습이 그네들의 새디즘적 베드신이 알게 모르게 슬픈 이유다.
사랑의 확인, 그러나.
이는 왕을 위해 큰 결심을 한다. 보석점에서 가장 커다랗고 아름다운 6캐럿짜리 다이아로 반지를 해주려는 것. 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 드디어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합일된 공간에서 왕과 만나고 싶다는 결심인 것이다. 왕은 이의 상징인 반지를 받고는 이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기로 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목숨. 그러나 그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왕은 이와의 공간과, 그리고 이와의 접촉, 사랑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잠깐이나마 온전히 마음을 연 이는 다시 한 번 깊은 절망에 빠지며 왕과 그 일당을 처형한다. 처형장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총으로 한번에 처형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은 격렬하고 폭력적이던 베드신을 상기해볼 때 오히려 신사적이다. 드러내지 않는 공간에서는 오히려 쿨해질 수 있는 법인가. 왕도 어떤 심적 동요 없이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마음에 큰 동요가 이는 것은 다른 이의 심적인 공간과 겹쳐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감출 수 없는 자신의 공간과, 내면, 감춰지지 않는 상대의 공간과 내면, 그리고 육체. 왕과 이는 그것을 결국 떼어내 버리고서야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왕을 죽이고는 왕이 머물렀던 방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이. 마침 찾아온 부인에게 늘 그랬듯 포커페이스의 싸늘한 남편으로서의 대사를 읊는다.
“당신은 마작이나 계속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