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절망적인 세 명의 웨이트리스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둘의 웨이트리스에게마저도 동정 받는 ‘파이굽기의 천재(genius of pie)' 제나는 폭력적이고 질투 많은 남편에게서 떠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녀를 가로 막는 것은 그를 떠날 수 있는 능력, 구체적으로 돈이다. 큰 돈을 모으기 위해 큰 상금이 걸린 파이 굽기 대회에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 경비를 다시 남편의 눈을 피해 모아야하는 처지다.
제 몸 하나 추스를 돈도 없는 제나에게 설상가상으로 증오하는 남편 얼의 아이가 들어선다. 술 취한 몇 주 전의 밤을 저주하는 제나. 남편에게서 멀어지려는 계획은 더욱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다가 새로 마을에 들어온 산부인과 의사, 그는 남편과 달리 신사적이고 로맨틱하다. 그에게 빠져드는 제나, 그러나 그도 유부남, 그녀도 유부녀일 뿐이다.
배는 부르다 못해 결국, 그녀는 아이를 낳게 된다. 아이를 안아보는 그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악의 남편 얼에게 <자기 인생에서 꺼져 달라>고 명령한다. 길길이 날뛰는 얼은 병원 직원들에게 제지당하며 끌려 나가고 그 보복으로 병원비를 내지 않아 제나는 산후조리도 못한 채 친구네 집으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마침 같은 날 간수술 문제로 입원했던 무뚝뚝하지만 제나의 파이를 인정했던 파이가게 사장 조는 숨을 거두고, 제나는 그가 남긴 마지막 카드와 함께 들어있는, 그녀의 꿈을 이룰 고액의 수표를 받게 된다. 파이가게를 내고, 파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그녀의 딸의 이름을 붙인 가게에서 마침내 행복해지는 제나,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
돌이켜보자. 그녀의 처음 문제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인지, 혹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자아실현의 선결조건은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한 돈이다.
중간에 멋진 의사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바램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진정한 상대를 찾는 것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유부남이라는 선천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는 그것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아이를 낳고서야 그녀는 자아성취의 선결조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녀는 ‘돈’과 ‘이해’와 관계없이 남편과의 단절과 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고약한 남편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그녀는 아이를 통해서 용기를 얻고, 조의 수표를 통해서 그 방법을 찾는다. 아마도 아이가 없었더라면 팁을 꼬불쳐 남편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을 터이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웨이트리스 생활을 계속 했을지 모른다.
웨이트리스는 자신의 생각보다는 남의 ‘주문’을 받아 사는 직업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남의 주문 사이에는 자신의 불만만 있을 뿐 그것을 깨어내고 자신의 의지를 집어넣는 것은 암묵적으로 불가능하다.(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웨이트리스가 아닌 것이다)웨이트리스라는 수동적 상징의 직업에 능동적이길 원하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결국 능동적이었는가. 제나는 딸이라는 다른 이의 주문을 받은 것을 자기 자신의 의지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의 수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녀의 가게를 열고 파이 굽기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묘사된 데로, 이제 파이 가게 주인이지만, 또한 여전히 웨이트리스이기도 하다. 언뜻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내게 유쾌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 처음부터 등장하는 파이 굽는 능력 이외에 그녀 스스로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다 주문 받은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꿈까지.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그것을 가벼운 톤으로 이리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성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