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그리고 천재를 꿈꾸는 인생

뤼튼존 2008. 2. 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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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취 생활은 외롭고 쓸쓸하다. 무언가 분명히 할 일은 있지만, 주변에 공유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미칠 노릇이다. 혼자 시켜 먹는 통닭은 세 조각 이상 맛있기 힘들다.


쓸쓸하고 외로워서 죽기 일보 직전에 죽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쓴다. 요 며칠 사이에서도 나는 생과 사의 순간을 오락가락 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늘 생에 집착하며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들이란 <말할 수 없는 비밀>, <피아노의 숲>, <호로비츠를 위하여> 쯤이 되겠다.


그 세 영화 중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피아노와 관련된 근작 영화를 찾다가 만화책으로도 재미있게 본 <피아노의 숲 (애니메이션 판)>(이하 피아노)과 <호로비츠를 위하여>(이하 호로비츠)를 찾게 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먼저 보았지만, 이 영화는 뒤의 두 영화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환타지 로맨스 SF 호러 물이고, 나머지 두 영화는 약간의 드라마적인 요소가 가미된, 비슷한 소재로 다른 주제의 요리를 만들어 낸 작품이다. 비슷한 소재의 다른 작품은 늘 비교∙대조 할 건덕지가 많이 마련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두 작품을 비교하게 되었다. 스포일러 지수를 최대한 줄이고, 이 영화들을 한꺼번에 틀어보도록 하자.


두 영화는 모두 가난한 천재소년이 등장한다. 카이와 경민. 카이는 술집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경민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할머니 밑에서 큰다. 그리고 카이는 아지노 선생님이라는 걸출한 선생님이, 경민은 실력이 없어 동네 피아노 학원을 열게 된 김지수 선생님이 생긴다. 당연히 여기서부터 영화의 방향은 빗나가게 된다.


<피아노>가 온전히 주인공 카이의 천재성과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실력파와 천재들의 향연을 그려낸 것이라면(물론 그 과정은 가슴시리도록 뭉클하다. 애니메이션 판보다는 만화책을 추천한다), <호로비츠>는 경민의 천재성에 자신을 투영시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살릴 수 없는 무능함에 대한 인정과, 자신의 삶을 결국 인정하게 되는, 그리고 정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그저 그런’ 선생님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다.


누구나 자신이 대단한 천재는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한 어느 정도 그렇다고 느끼고 있다. 이른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더욱더 그런 생각을 아니할 리 없다. 나라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터 그런 생각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학점은 나오지 않고, 자신의 생각 따위는 개똥철학으로 치부 당한다. 호기로운 일탈은 비난의 십자포화를 받기 십상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연인은 떠나고 고시공부라도 한 번 시작했다가 떨어지고 나서부터는 눈만 높아져서 원하는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가 않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군대에 느지막이 끌려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은 그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처지다. 자신에 대한 처지는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주로 돈에 관한, 혹은 명예에 관한 지표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버틸 수 있다. 그 작은 가능성조차 쉽사리 얻지 못한다. <호로비츠>에서의 지수의 주변도 지수를 그렇게 다그치고 비꼰다. 같이 피아노를 치던 동기는 대학강사가 된 지금 지수에게 남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뿐, 결국 생활고는 지수를 동네 피아노 선생으로 내몬다.(여기까지는 극의 초초반 뿐이라 이런 선명한 스포일러를 사용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영화의 제목이 아니다!)을 간직하게 된 지수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기만 하다.


그런 지수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이 있으니, 가난하지만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는 경민이다. 지수는 경민에게 희망을 꿈꾼다. 마치 그런 것이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학원에 가게 되면 흔히 보는 온통 자기 자식에 대한 칭찬과 기대 일색으로 찾아오는 부모님의 마음, 혹은 똑똑하거나 재능 있는 제자를 은연 중 자랑하고 또 편애하는 선생님의 마음. 그들의 마음은 아이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미래에 닿아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은 그런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며 성급히 동일시한다.


어쨌든 좋다. 천재가 나타났고, 그 천재가 자신을 좀 더 나은 상황으로, 혹은 보람으로 남을 것이라는 평범한 부모님들과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학원선생님의 바램들. 여러분 역시 한번씩은 그런 기대를 받아보고 자라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직은 희망이 있다지만, 이제 곧 세상의 쓴 맛을 보고 세상의 부속품으로 자리매김할 수많은 20대 중후반 여러분은 어쩌면 10년 뒤, 자신의 아래세대의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으면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을, 특히 졸업할 즈음이 된 학형들의 부모님들을 보시라. 이제 그분들의 희망은 여러분을, 혹은 나를 통한 본인의 반사이익, 혹은 후광조차도 아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자립’만 해다오, 인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자립을 하고, 그렇게 누군가와 번식을 하고, 잡종 1세대의 우월함을 막연히 기대하면서 쳇바퀴 돌 듯 직장생활을 견뎌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때는 천재일수 있었던 자신의 운명을 쓸쓸히 추억하면서, 믿을 건 자식뿐이라고 그렇게 과로로 쓰러져가며 일을 하고,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대학공부를 시키고, 심지어 그때까지 남아있다면 고시공부를 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내 마지막 탄환이 과녁을 벗어나 어디 뒤편 나무쯤에 가서 박히게 될 때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냥 지쳤으니 이제 ‘자립’만 해다오?


<호로비츠>의 드디어 지수는 어려운 결심을 한다. 자신의 꿈과 같은, 자신에게 축복처럼 내려온  경민을 오로지 경민의 미래만을 위해 자신과 유리시키는 것은 결국 지수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 생각했지만, 지수는 아마도 그 시점부터 천재가 아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천재를 키워낼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제 서야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호로비츠>는 이전의 천재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천재에 대한 환상과 재능의 향연을 천재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세상과 불만스러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해야만 애정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하지는 않아도 어렴풋한 답을 제시하는 영화다. 천재를 꿈꾸고, 혹은 천재를 키워내기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과연 당신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라, 하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그러다 보면 기회가 오니까요, 하고 속삭이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천재에 대한 동경과 찬탄보다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찾아가는 한 어른의 성장영화다. 아쉬운 점은 그렇게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지수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 어쩌면, 나는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야만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