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영화

삶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하여 잃어야하는 것들 -영화 '시'를 보고

뤼튼존 2010. 6. 4. 19:10




삶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하여 - 영화 '시'를 보고

시종일관 담담한 앵글과 배경음악 하나 없는 꾸밈없는 소리로 예쁘고, 즐겁고, 불편하고, 슬픈 진실들을 모두를 '아름다움'이라고 지칭하는 이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은 줄거리로만 보자면 2시간 남짓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지루함을 감당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그 두어 시간동안, 일상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수많은 진실들을 솔직하게 화면에 부려놓고,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죽음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한 인간이 어떻게 점점 자신의 마음을 깊은 아름다움으로 채워 넣는 과정을 섬세히 그려내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여정에 자연스레 몸을 싫고 가슴 깊이 공감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실 이 영화는 줄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인 미자(윤정희 분)가 줄거리에 따른 시간적인 흐름을 밟아가면서도 삶의 의미를 취합하는 것에 상당히 많고 복잡한 단편들을 종합하고 있으므로, 대강의 줄거리를 밝히는 것이 영화의 커다란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이 영화는 미자가 삶의 의미를 찾다가 결국 그 의미를 정의내리기보다는, 삶에서 본 조각조각들을 소담하게 모아 이어붙인 것을 삶으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의미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물론 스포일러의 의도는 없다)

의미를 찾아가고 깨닫고자 하는 여정에 이창동 감독은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사용한다. 일부러 배경음악을 빼기도 하고(2명의 음악감독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창동 감독이 배경음악을 빼기로 최종 결정하자 크게 낙심하면서도 왠지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한다), 시 강좌나 시낭송회의 장면은 의도적으로 참석자의 시선으로 연단을 보도록 함으로써 그 행사에 직접 관객이 참가자가 된 듯 하는 뉘앙스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복합적 사건과 이미지, 장치 속에서도 미자가 앓고 있는 병, 알츠하이머(치매)가 영화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것

미자는 팔이 저릿저릿하다는 이유로 병원에 간다. 정작 아픈 팔에 대해서는 운동을 좀 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의사가 말한다. 의사는 오히려 상담 도중 미자가 푸념처럼 늘어놓은 '요새 내가 이래요. 가끔씩 단어가 생각이 안 나'라는 말을 듣고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기를 권한다. 미자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는다. 의사는 미자와 알츠하이머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처음에는 명사가 생각이 나지 않으실 거구요, 그 다음에는 동사...뭐 이런 순서로 생각이 안 나실 거예요."

"아, 명사가 제일 중요한 건데...그렇죠?"

병원을 나선 미자는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다. "동서울..."까지만 여러번 반복한다. 그러다가 결국 "저...있잖아요, 버스 타고 저 멀리 가는..."하는 긴 설명을 통해서 기사에게 "아, 터미널이요?"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요새 제가 이래요..."라고 부끄러운듯이 말하는 미자는 이미 영화의 앞부분에서도 여러 차례 사물의 이름을 잊어먹은 적이 있다. 지갑을 찾으면서 도움을 구하는 미자는 지갑이 아닌 "돈 넣는 네모난..." 것의 행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자의 일상에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미자에게는 인정하기 싫을 뿐더러 충격적인 일이다. 사물의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대상을 지칭함에 있어 사람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소통은 점점 불편해지고 장황해지기만 한다. 미자는 자신이 단어들을 잊어가면서도 무의식중에 예전의 백일장에서 선생님께 칭찬받던 생각을 하며 문화원에서 하는 시 강좌를 신청하게 된다.

극 중에서 문화원의 시 강좌를 맡고 있는 김용탁 시인(김용택 시인 분)은 사과를 꺼내며 여기 있는 수강생들은 단 한 번도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사물과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서만 시상(詩想)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에게 미자는 도대체 시상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를 묻지만 시인은 시원스러운 답변을 해주지 못하고 알듯 말듯 한 대답만을 해줄 뿐이다.

극 중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과 바라보기'는 '낯설게 하기'라는 오랜 글쓰기 방법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법론에 대해서 미자는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그것은 그녀의 시작(詩作)을 돕지 못한다. 미자는 그저 묵묵히 주변의 모습들을 노트에게 생각나는 대로 적을 뿐이다. 시에 가닿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지고, 사고를 친 손자 녀석의 커다란 합의금을 마련해야하는 생활고까지 겹쳐 미자는 심신이 급속도로 지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변을 느낌 그대로 기록하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자는 알츠하이머로 점점 명사를 잃는다.(감독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치매는 서서히 정신적 죽음을 경험하는 병이다) 몸도 점점 쇠약해져 간다. 삶의 의미를 쏟았던 손자가 엇나가면서 미자는 삶의 의미를 점점 잃어가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자는 그것에서 점점 자신의 삶과 시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된다.



시 - 잃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

사물의 이름을, 즉 명사를 잊어버리는 미자는 다른 사람을 소통을 위해 그 명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하는 불편함을 겪는다. 하지만 미자는 이름을 읽어버리는 대신에 그것이 가리고 있던 의미를 비로소 점차 풀어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짧은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무수한 내용을 우리는 다들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명사는 관념적이다. 명사는 하나의 특정한 세계의 경계와 대상의 속성을 묶은 매우 관념적인 단어다. 약속된 이름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서는 그 속성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마치 문화원 강좌에서 시인이 지적한 바대로 사과를 수없이 먹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과 같다. 그러나 미자는 문화원 강좌에서 시인이 얘기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시를 쓰지 않는다. 미자는 자신이 명사를 잃어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비관하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슬픈 세상을 명사로 규정하지 않고, 대신 차근차근 주변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나열하는 것으로 풀어내게 되고, 마지막에 한편의 시로 승화된다.

그것은 그동안 생을 통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언어와 삶의 틀이 허물어지면서 생긴 틈새로 보이는 슬프고 괴롭고 아름다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참 진실이다. 미자는 언어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손자의 큰 잘못을 통해 자신이 쏟았던 애정에 대한 배신감을 마주한다. 돈 때문에 인간적인 자존심의 상처도 입는다. 그러나 미자는 이러한 다양한 상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고 시를 얻는다. 그렇게 인식한 삶은 괴롭고 고단할지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노래한 시 역시 아름다움이라고 영화는 이야기 한다.

시는 아름다운 생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서술한 것이다. 그 마지막 용기를 내고서 두 여인은 같은 마음을 먹고, 곧 같은 곳에서 만난다.







p.s 1 CGV 왕십리 6월 3일 19:00에 시작된 영화가 끝나고 갑자기 이창동 감독이 들어왔다. 관객들과의 질의응답과 함께 30여분 가량 진행된 행사에 이창동 감독은 영화 내의 다양한 장치와 의미에 대해서 매우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이 글에서 감독의 의도나 멘트라고 언급한 것은 이창동 감독이 그 질의응답 과정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토시만 다를 뿐 내용적으로는 거의 일치한다. 매우 신선한 시간이었고, 개인적으론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p.s 2 이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없다.

p.s 3 이 영화에 교감선생님으로 나오는 사람은 최문순 전 MBC 사장이다.

p.s 4 이 영화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에 대해서 이창동 감독은 의도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그러한 해석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어필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어떤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내든 관객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p.s 4 마지막 줄에 뜬금없이 '두 여인'을 언급했지만 의도하지 않는 실수가 아니라 영화의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면서 두 여인이 '시'에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를 혹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음미하셨음 좋겠다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썼다.

p.s 5 시간 관계상 나까지 돌아오지 않는 질문 시간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은 '고되고 슬픈 진실이 그 자체로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이창동 감독은 그 전의 질의 응답에서 세상의 모든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p.s 6 대단히 복합적인 일상의 단편들이 함께 엮여 나가기 때문에 지금 글을 쓴 주제 외에도 생각해볼만한 것이 많다. 어떤 플롯을 따라가느냐에 따라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담담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